뜬세상의 아름다움(정약용 지음, 박무영 옮김 태학사 2002)
다산 연보에는 다산의 임종 장면이 장엄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날(1836년 2월 22일) 진시辰時에 큰 바람이 땅을 슬며 불고 햇빛이 엷어져 어둑어둑해지며 누렇게 토우(흙비)의 기운이 끼었다. 문인 이강회李綱會가 서울에 있었는데, 큰 집이 무너져내려 누르는 꿈을 꾸었다'.
다산의 부고가 전해지자, 홍길주洪吉周는 "열수(다산의 다른 호)가 죽었구나! 수만 권 서고가 무너졌구나!"라고 탄식했다.
그러나 정작 장엄한 것은 이 거인의죽음이 아니다. 이 거인이 500권에 이르는 저서를 저술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장엄하다.
다산은 젊은 시절 '장래 재상감'이었다. 정조는 그를 드러내놓고 자랑했고, 비호했다. 그런 인생의 정점에서 일시에 겨우 죽음을 면한 사학죄인의 신세로 추락해버린 것이 다산이었다. 유배지 강진에 도착하자 아무도 상대하려 하지 않았고 울타리를 헐어버리고 도망쳐버렸다. 그를 불쌍히 여긴 읍내 주막의 할멈이 방 한 칸을 내주어 겨우 기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음력으로 11월이었으니 주막 방에 틀어박혀 듣는 강진만의 바다 바람소리가 얼마나 칼바람이었을까.
이때 그는 외친다. '나는 이제야 독서할 시간을 얻었구나, 축복이다'
다산의 저작들은 대부분 유배기에 저술되었거나, 정리되었거나, 아니면 초고가 마련된 것들이다. 그의 저작들은 유배 초기에는 극도로 경제적 곤란과 외로움 속에, 외가인 해남 윤씨들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찾았던 유배 후반기에는 육체적으로 무너져 가는 고통 속에서 작성된 것이다. 중풍으로 수족을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눈조차 잘 보이지 않는 지경에서 제자들에게, 때로는 근친 와 있는 이들에게 구술하여 받아쓰게 하면서 이루어진 저술들인 것이다.
그는 현실적 개혁에의 의지가 실현의 길로 봉쇄당하자, 저술로 자신의 개혁구상을 완성시켜 남겨 놓으려는 불굴의 열정으로 개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뤄어진 것이 '여유당전서' 500권이다.
다산의 중형 정약전丁若全은 다산의 저술을 잃고 '그의 정치적 좌절이 개인적으로 불행하였으나 세상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고 했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산은 '너희들이 학문을 해서 내가 남긴 글들을 읽고 정리해서 간행해 주지 않는다면 내 평생의 저술들은 다 흩어져 버리고 말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후세의 사람들이 재판기관과 반대파들의 상소문으로만 나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라고 호소한다.
천주교 탄압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1801년 신유사옥新酉邪獄은 내용적으로는 정치적 숙청을 겸한 것이었다. 조선후기 권력을 독점해온 노론 일파가 정조의 통치 아래 남인들에게 나눠주게 되었던 권력을 회수하는 기회로 삼은 사건이었다.
다산의 저술이 이뤄어지던 이런 광경을 듣고 있노라면,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짓던 마음이 생각난다. 분노와 좌절의 열정을 저술에의 에너지로 전화시켜간 놀라운 의지 이면에 있는 처절한 슬품을 감지하게 된다.
'내가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는 것은 눈앞의 근심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내가 남의 아비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이처럼 누를 끼치는 것이 부끄럽고, 그래서 내 저술로서 너희들에게 속죄하고자 하는 것이다.'
첫 유배지인 장기에 도착해 아들들에게 쓴 첫 편지에서 다산은 이렇게 밝혔다.
-옮긴이의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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